쉰살 변호사와 연하 중국집 사장님의 불안한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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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살의 노련한 변호사. 하지만 결혼은 야속했다. 이상적인 남자를 찾지 못해 홀로 지켜온 자존심은 15살 연하의 동네 중국집 사장 앞에서 무너졌다. 고졸 출신에 팔뚝이 굵고 다부진 몸매를 가진,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그에게 정신없이 빠져버린 그녀. 그는 그저 고분고분 결혼 말고 가볍게 만나자 속삭일 뿐인데, 왜 그녀는 이 관계를 놓지 못하는 걸까? 대체 그의 어떤 매력이 이성적인 그녀를 이토록 헤어나오지 못하게 붙잡는 것일까?

"안녕하세요. 벌써 쉰살이네요. 이름은 윤희라고 합니다."

이 나이를 먹도록 결혼은커녕 변변한 연애 하나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은 숨 쉬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었어요. 서른 즈음에 나에게 쉰살은 까마득한 미래였고, 그때쯤이면 당연히 사랑하는 남편과 귀여운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죠.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달랐어요. 마치 내가 사는 세상과 다른 사람들의 세상이 완전히 분리된 것 같은 기분이었죠.

30대 초반,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어요. 5년을 온 마음 다해 사랑했고 결혼까지 약속했던 남자 친구였거든요. 그의 새로운 연인과 함께 있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죠. 드라마에서나 보던 환승 이별이었거든요.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어요.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네요. 이유도 모른 채 차였는지 자책하며 매일 밤 눈물로 지새웠죠. 그의 행복한 모습은 나를 더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었거든요.

그 상처는 너무 깊어 쉬이 아물지 않았죠. 사람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두려워졌고, 내 가치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았어요. 그 지옥 같던 시간들을 겨우겨우 버텨내고 다시 좋은 인연을 찾기 위해 발버둥 쳤죠.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오기 같은 것이었어요. 친구들에게, 지인들에게,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또 부탁해서 소개팅 자리에 나갔어요. 1년에 몇 번씩, 어떤 주는 한 달에 몇 번씩까지도 나갔죠. 매번 기대에 부풀어 나갔지만 결과는 늘 실망스러웠어요. 첫 만남에서부터 나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거나, 대화가 통하지 않거나, 애프터 신청이 없거나, 몇 번 만나다 이유도 모르게 흐지부지되거나. 똑같은 패턴의 반복이었죠. 어떤 남자들은 나이 때문에 아예 벽을 치는 것 같았고, 어떤 남자들은 노골적으로 외모를 평가하는 듯한 눈빛을 보였어요. 30대 후반이 되면서부터는 마치 유통기한 지난 상품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죠.

엄마는 더 이상 나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는지 답답한 마음에 결혼 정보 업체에 나를 등록하였어요. 등급이 매겨지고 프로필을 보여주며 상대를 고르는 과정은 마치 내가 물건이 된 것 같은 비참함을 느끼게 했죠. 그곳에서 만난 남자들, 친척들이 억지로 소개해 준 남자들과도 몇 번 짧은 만남을 가졌지만 영 인연이 닿지 않았죠. 조건은 괜찮아 보여도 막상 만나보면 어딘가 불편하거나, 나만 관계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어요. 그들은 대부분 결혼을 ‘해야 해서’ 상대를 찾는 듯했고, 나에게서 사랑이나 설렘을 찾기보다 조건이나 안정을 찾는 것 같았어요. 나 역시 그들에게서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며 점점 더 자신감을 잃어갔죠.

시간이 흐를수록 선 자리 제안도 눈에 띄
게 줄어들었어요. ‘저 나이에 아직도 못 갔으면 문제가 있겠지’라는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거든요. 세상에 나만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었죠. 휴대폰에는 하루 걸러 하루 지인들의 청첩장이 도착했어요. 이제 막 결혼하는 20대 후반부터 나와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까지, 예쁜 드레스를 입고 행복하게 웃는 사진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시렸죠. 하나둘씩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고 사는 모습을 보며 나는 점점 더 사회에서 도태되는 기분이 들었어요. 불안감과 히스테리는 극에 달했죠.

‘왜 나만 이럴까? 내가 뭐가 부족할까?’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며 자책하기 일쑤였죠. 늘어나는 기미와 깊어지는 눈가와 팔자 주름은 나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고, 피부는 탄력을 잃고 칙칙해져만 갔어요. 젊고 예쁜 여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나는 이미 경쟁력을 잃은 것처럼 느껴졌죠. 어떻게든 변하고 싶었어요. 남들처럼 예뻐져서, 어려 보여서, 다시 매력적인 여자가 되어서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죠. 용기를 내서 피부과에 가서 보톡스와 필러 시술을 받았어요. 조금은 나아진 것 같기도 했지만, 이미 타고난 원판 불변의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었죠.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어요. 그저 잠시의 위안일 뿐이었죠. 돈과 시간을 들여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좌절했습니다.

그렇게 외모와 나이에 대한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을 때, 힘들게 겨우겨우 선 자리라도 물어왔죠. 요즘 남자들은 어찌나 눈썰미가 좋고 똑똑한지, 내가 애써 젊어 보이려고 노력한 흔적이나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것 같았어요. ‘착하고 성실해요’라는 주선자의 말만으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더군요.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넘어오지 않았죠. 몇 번의 만남 후 연락이 끊기는 패턴은 변함이 없었어요.
 ‘또 실패했구나’ 하는 좌절감이 쌓였죠. 이제 선 자리나 소개팅은 거의 끊겼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입한 인터넷 동호회에서도 진정한 결혼 상대를 찾기보다 가볍게 즐기려는 엔조이 분위기가 만연했어요. 나에게 다가오는 남자들조차 진지한 만남보다는 하룻밤 상대를 찾는 경우가 많았어요.

‘아, 나 같은 나이의 여자에게는 이런 것밖엔 남지 않았구나.’

하는 절망감이 밀려왔죠.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었네요. 30 넘어서부터 시작된 연애 시장에서의 고군분투는 40흔이 넘어서도 계속되고 있었고, 이제는 지치다 못해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차라리 혼자 늙어가는 것에 익숙해지는 편이 덜 상처받는 길이 아닐까 생각했죠.

그날은 유독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어요. 복잡한 사건 서류 때문에 야근 아닌 야근을 하고 다섯 시간을 훌쩍 넘어 일이 끝났죠. 변호사라는 직업이 이럴 땐 참 고단했어요. 정신적으로 피로가 극심했어요. 저녁 6시가 다 되어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퇴근해서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배가 무지하게 고팠네요. 딱히 해 먹을 힘도 없고 뜨끈한 국물에 밥 말아 먹고 싶은 생각뿐이었죠. 차갑게 식어 버린 마음과 몸을 동시에 녹여줄 무언가가 절실했어요.

얼마 전 집 근처에 새로 생긴 중국집이 떠올랐어요. 간판이 깔끔하고 외관이 깨끗해서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죠. ‘청년 사장이 운영하는 곳’이라는 현수막도 봤던 것 같았어요. 왠지 모르게 정갈하고 맛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죠. 이 동네는 오피스텔 건물이 많아서 그런지 혼밥이나 혼술하는 분들이 꽤 많았거든요. 혼자 밥 먹는 것에 익숙한 나에게 부담 없는 곳일 것 같았죠.
망설임 없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어요. 가게 안은 생각보다 훨씬 깔끔했어요. 테이블도 칸막이가 되어 있어서 혼밥하기에 편해 보였죠.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판을 훑어보았어요. 짬뽕 하나에 소주 한 병. 지치고 초라해진 나에게 주는 작은 위안 같은 메뉴였죠. 뜨거운 국물에 알코올 한 모금이면 오늘 하루의 고단함을 조금은 잊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휴대폰으로 시시콜한 뉴스나 보며 밥을 먹을 작정이었어요. 어차피 누구와 연락할 일도, 연락 올 것도 없었죠.
짬뽕이 나오고, 매콤한 향과 함께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어요. 얼큰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고, 뜨거운 국물을 후루룩 마시니 속이 시원하게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해물도 푸짐하고 국물도 얼큰했어요.

‘어라? 여기 맛집이네!’

생각하며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했죠. 그때였어요.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사내가 내 테이블로 다가왔죠. 깔끔한 셔츠에 앞치마를 두른 모습이 가게 사장인 듯했죠. 웍을 다루느라 다져진 팔뚝이 굵고, 몸매가 다부져 보였어요. 손에는 접시를 들고 있었는데, 노릇하게 튀겨진 군만두가 한가득 담겨 있었어요.

"손님, 이거 서비스인데 한번 드셔 보셔요. 맛있게 드시고 홍보 좀 해 주십시오. 하하."

예상치 못한 호의와 유쾌한 인사에 조금 당황했죠. 무엇보다 젊은 사내가 나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게 익숙지 않았거든요.

"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막상 접시를 받아보니 양이 상당했죠.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었어요.

"어머, 사장님. 이거 양이 너무 많아요. 다 못 먹을 것 같아요."

"하하,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세요. 드시고 남는 건 예쁘게 포장해서 드릴게요."

그의 목소리는 저음이면서도 부드러웠어요. 인상도 서글서글하니 좋았죠. 눈매가 길게 뻗은 게 시원해 보였고, 웃을 때 살짝 접히는 눈꼬리가 매력적이었어요. 무엇보다 말투에서 느껴지는 친절함과 배려심이 좋았네요.

"그래요? 사장님 정말 감사해요."

그렇게 군만두를 옆에 두고 짬뽕을 마저 먹었어요. 짬뽕은 정말 맛있었고, 그가 준 군만두는 왠지 모르게 더 바삭하고 고소하게 느껴졌죠. 그의 작은 호의 덕분에 지치고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은 녹아내리는 것 같았어요. 혼자 밥 먹는 쓸쓸함도 덜어지는 기분이었거든요.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러 카운터로 가니, 사장님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어요. 그의 웃음은 억지가 아닌 진심이 느껴지더군요.

"음식 맛있게 드셨나요?"

"네, 사장님. 정말 맛있네요. 앞으로 자주 오게 될 것 같아요. 집도 가깝고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자주 와 주시면 저야 영광이죠. 아 참, 남으신 군만두는 여기 포장에 두었습니다. 가져가시면 됩니다."

"아, 네, 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젊은 사장님이 왜 이렇게 손이 크세요? 손님한테 이렇게 막 퍼주면 남는 게 있어요?"

"하하, 뭐 앞으로 자주 오시라고 서비스 드리는 거죠. 일단 한번 와서 드셔 보신 분들은 맛 때문에라도 다시 오실 거라고 믿어요. 그리고 손님처럼 단골손님이라도 되면 저희 가게 입장에선 훨씬 큰 이득 아니겠어요? 단골분들이야말로 저희 가게를 살리는 분들이시니까요."

"아, 그렇군요. 사장님 생각하시는 게 남다르시네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군만두 때문이라도 앞으로 자주 와야겠네요.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인사하고 포장된 군만두 봉지를 들고 밖으로 나왔어요. 손에는 따뜻한 봉지가, 마음속에는 그의 작은 호의와 어쩌면 나에게 관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기대감이 자리 잡았죠. 집에 와서도 군만두를 보며 괜히 기분이 좋아졌어요. 지치고 외로웠던 마음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 같았거든요.

그날 이후, 나는 그 중국집에 단골이 되었죠. 정말 약속이라도 한 듯 일주일에 두어 번, 어떤 주는 서너 번까지도 그 식당을 찾아가 끼니를 해결했죠. 때로는 혼자, 때로는 가게 분위기를 느끼며 밥을 먹었어요. 갈 때마다 사장님은 나를 알아보며 먼저 다가와서 활기차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죠.

"어서 오세요, 손님! 오늘 점심은 짬뽕으로 하시죠?"

이쯤 되니 확신이 들었죠. 그 역시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요. 그는 나를 볼 때마다 눈이 마주치면 빙긋 웃고, 주문을 받을 때나 음식을 가져다줄 때 짧은 대화라도 걸었어요.

"오늘 날씨 좋죠?"

"일찍 퇴근하시네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그의 사소한 말 한마디가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죠. 나 역시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어요. 3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년 같은 해맑은 미소를 가지고 있었고, 성실하게 가게를 운영하는 모습은 어른스럽고 믿음직스러워 보였어요. 그렇게 수개월째 얼굴을 마주하고 짧은 대화라도 나누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 남자에게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죠. 딱히 어떤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매일 반복되는 지루하고 외로운 일상 속에 그의 존재는 작은 설렘으로 다가왔어요. 그 남자 역시 나를 볼 때마다 눈빛이 달라지는 것 같기도 하고, 대화할 때 나에게 더 집중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에게 조금의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죠.

어느 날, 짬뽕을 먹고 계산을 하려는데 사장님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죠.

"윤희 씨,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어느새 호칭은 ‘손님’에서 ‘윤희 씨’로 바뀌어 있었죠.

"그나저나 사장님, 이렇게 성실하신데 결혼은 안 하세요?"

"아이고, 애인도 없는데 무슨 결혼이에요. 하하. 제 나이 또래 친구들은 하나둘 가고 있는데 저는 아직 갈 길이 멀었나 봅니다. 혹시 윤희 씨가 저한테 중매라도 서주시게요?"

재치 있는 대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죠. 이런 가벼운 농담을 자연스럽게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는 게 신기했어요.

"네? 중매는요. 사장님 서주려면 상대가 있어야 할 텐데, 저도 아직 미혼인데요."

"아이고, 실례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가게 손님과 사장님이라는 관계를 넘어 서로의 삶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사이가 되었죠. 또 다른 날이었어요. 짬뽕을 다 먹고 가게 앞에 설치된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 마시고 있었죠. 밤늦은 시간이라 손님도 거의 없었고, 가게 안은 정리하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렸어요. 그때 사장님이 다시 나에게 다가왔죠. 오늘따라 조금 더 진지한 표정이었어요.

"윤희 씨, 혹시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왠지 모르게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심장이 쿵쾅거렸죠.

"네, 사장님. 무슨 부탁이세요?"

"저희 가게에서 얼마 전부터 배달 서비스를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가게 앞에 오토바이 세울 데가 마땅치 않아서요. 단속도 심하고, 배달 나갔다 들어올 때 잠깐 세워둘 곳이 필요하거든요. 혹시, 혹시 말이에요, 윤희 씨 사시는 건물 주차장 한 편을 아주 잠깐만 이용해도 될까요? 배달 다녀오고 금방 빼니까 폐 끼치지는 않을 거예요."

전혀 예상치 못한 부탁이었죠. 사적인 공간인 주차장을 빌려 달라니. 잠시 당황했지만 그의 간절한 눈빛과 곤란해하는 상황이 눈에 들어왔어요. 젊은 나이에 어렵게 가게를 시작해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죠. 우리 건물 주차장은 꽤 넓고 입주민 외에는 거의 이용하지 않아 항상 비어 있는 공간이 많았거든요. 한쪽 구석이야 잠깐 세워 두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죠.

"아, 네, 네. 사장님 그러세요. 비어 있는 곳 있으면 잠깐 세우세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두 손을 모으며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꾸벅 인사했죠. 그의 얼굴에는 감사함과 안도감이 가득했어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윤희 씨! 신세 제대로 졌습니다! 언제 한번 꼭 신세 제대로 갚을게요!"

쑥스러워하면서도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그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죠.

"아닙니다. 괜찮아요. 별것도 아닌데요, 뭐."

그때였어요. 그가 주춤거리며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혹시 주차 때문에 연락드릴 일 있으면, 편하게 연락드릴 번호 하나 받을 수 있을까요? 혹시라도 차 빼 달라고 하거나 할 수도 있어서요."

주차를 핑계로 연락처를 달라는 그의 속셈이 너무나 명확하게 보였죠. 물론 나쁜 속셈이라기보다는 나에게 관심이 있으니 연락할 구실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졌죠. 그의 진심이 담긴 눈빛을 보니 싫지 않았어요. 아니, 사실은 속으로 ‘드디어!’ 하고 외치고 있었을지도 몰랐죠. 지긋지긋했던 외로움과 마른 땅 같던 내 삶의 단비가 내리는 순간처럼 느껴졌거든요.

"네, 그러세요."

나는 망설임 없이 내 휴대폰을 건네 그의 번호를 저장하고 내 번호를 입력해 주었죠. 그의 손끝이 내 손에 살짝 닿았을 때 온몸에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듯했어요. 그렇게 연락처를 주고받고 우리는 급격히 가까워졌네요. 낮에는 가게에서 손님과 사장님으로 만나고, 밤에는 문자로 서로의 일상과 속마음을 공유했죠. 가끔은 그가 가게 일을 마치고 밤늦게,

"오늘 너무 힘들었어요. 짬뽕 국물에 소주 한잔 하고 싶네요."

하고 문자를 보내오기도 했고, 나도 야근하는 날이면,

"사장님 짬뽕 생각 간절하네요."

하고 답장을 보내기도 했죠. 사소한 문자 하나하나에 설렘과 온기가 담겨 있었어요. 문자로 서로의 나이를 묻다가 그가 35살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나보다 15살이 어렸어요. 적지 않은 나이 차이에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미 그에게 마음이 기울어 버린 후였죠. 나이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설득했죠.

그리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연애사를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5년간 직장 생활을 하다 지인의 중국집에서 2년간 주방 일을 배우고 이 가게를 창업하게 되었다고 했어요. 젊은 나이에 혼자 힘으로 가게를 열었다는 것이 대단해 보였죠. 그리고 그 역시 3년 사귄 여자 친구가 환승 이별을 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어요. 그때 나이는 32살이었고 여자 친구는 27살이었다고 했어요. 회사에서 만나 몰래 2년 연애했고, 여자 친구가 회사를 그만두고도 1년을 더 만났다고 했죠. 자신은 결혼을 생각할 나이가 되었고 여자 친구와도 미래를 그려보고 있었는데, 여자 친구는 아직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고 하더라고요. 나이 차이가 있어서 결혼까지 갈 수 있을까 스스로도 고민이 많아질 때쯤, 여자 친구가 초등학교 동창과 눈이 맞아버렸다고 했죠.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고 충격에 빠져 반년 정도를 폐인처럼 방황했다고 하더군요. 술에 의존하며 살다가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원래부터 꿈꿨던 요식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중국집에서 기술을 배워 이를 악물고 창업하게 되었다고 했어요.

그의 이야기는 마치 내 과거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나보다 어린 나이에, 그것도 3년을 만난 연인에게 배신당한 그의 이야기. 5년 만난 남자 친구에게 환승 이별을 당했던 내 과거와 너무나 겹쳐졌죠. 배신감, 상실감, 미래에 대한 불안감. 같은 종류의 상처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질감 같은 것이 느껴졌어요. 마치 서로의 상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난 듯한 기분이었죠. 갑자기 이렇게 진지하고 아픈 속마음을 내 앞에서 쏟아내는데, 그것도 맨정신에 말이죠. 순간 우리가 이런 깊은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워졌나 싶어 놀라웠어요. 하지만 그의 진심이 느껴졌고, 나 역시 그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고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내 지난 연애의 아픔과 지금의 불안감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어요. 쉰살이 넘어서도 결혼하지 못하고 매번 인연에 실패하며 얼마나 지치고 외로웠는지, 보톡스와 필러 이야기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았죠. 그는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 주었고, 가끔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더군요. 그에게서 위로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 남자, 나에게 진심으로 다가오고 있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죠.

그렇게 문자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말에 그에게서 연락이 왔죠.

"윤희 씨, 저녁에 잠깐 시간 되면 차라도 한잔할까요?"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죠. ‘이게 데이트 신청이겠지?’ 15살이나 어린 남자에게서 받는 첫 데이트 신청.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하고 설레는 기분이 동시에 밀려왔어요. 애써 태연한 척 답장했죠.

"네, 좋아요."

저녁에 만나 근처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어요. 마주 앉으니 낮에 가게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죠. 그는 댄디한 캐주얼 차림이었고, 가게 유니폼을 입고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젊고 매력적으로 보였어요. 왠지 모르게 어색하면서도 설레는 기분이 들었죠. 다시 한번 그의 환승 이별 이야기를 이번에는 내 앞에서 직접 풀어놓았습니다.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그 안에 담긴 상처와 아픔이 느껴졌어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었고, 그의 아픔에 공감했죠. 나보다 어린 나이에, 그것도 3년을 만난 연인에게 배신당한 그의 이야기. 5년 만난 남자 친구에게 환승 이별을 당했던 내 과거와 겹쳐지며 우리는 서로에게 깊은 위로가 되었죠.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었죠.
 갑자기 이렇게 진지한 속마음을 내 앞에서 쏟아내는데, 그것도 맨정신에 말이죠. 순간 우리가 이런 깊은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워졌나 싶어 놀라웠어요. 그에게서 위로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 남자, 나에게 진심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죠.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저녁 시간이 되었죠. 내가 차를 샀으니 저녁은 내가 사겠다고 했죠. 그가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그의 작은 호의들에 대한 고마움과 오늘 깊은 이야기를 나눈 것에 대한 감사함에 꼭 저녁을 사고 싶었거든요. 그러자 그는 "말은 안 그래도 되는데..." 하면서 근처에 춘천 닭갈비로 유명한 곳이 있다며 거기로 가자는 거였어요. 그의 제안에 기분 좋게 따라나섰어요.

닭갈비 집에 도착해 2인분에 소주 한 병을 시켰죠. 지글지글 익어가는 닭갈비 냄새가 식욕을 돋웠죠. 오랜만에 혼밥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먹는 저녁이었죠. 그것도 15살이나 어린 중국집 사장님과 함께. 붉게 양념된 닭갈비를 뒤집으며 소주잔을 기울였네요. 낮에 나눈 진지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가게 운영 이야기, 동네 이야기, 어릴 적 이야기 그리고 서로의 꿈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씩 나왔죠.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그의 소탈한 웃음소리, 이야기에 집중하는 그의 눈빛이 좋았죠. 쉰살이 되어, 그것도 15살이나 어린 남자와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웃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처럼 느껴졌어요.

밥값은 내가 냈으니 술은 또 자기가 사겠다며 2차로 근처 호프집에 가자고 했죠. 시끌벅적한 호프집에 앉아 1,500cc 생맥주를 시켜 나눠 마셨죠.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좀 더 편안하게 웃고 떠들었어요. 가게 이야기, 동네 이야기, 어릴 적 이야기, 사소한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더 가까워졌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밤 10시가 훌쩍 넘어 자리에서 일어났죠.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하늘에서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죠.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날씨가 순식간에 변했죠. 우산 없이는 잠시라도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하늘이 원망스러웠죠. 이런 날 갑자기 헤어지기는 아쉬웠거든요.

"철민 씨, 이건 낭패네요. 우산도 없이... 이러다 홀딱 비에 젖겠는데요."

"그러네요. 어쩌죠?"

그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스쳤어요. 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죠.

"윤희 씨, 하는 수 없어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편의점에 가서 우산 하나 사 올게요. 편의점, 저기 코너 돌면 바로 있어요."

"안 돼요! 그러면 철민 씨만 비 맞을 텐데. 같이 가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요. 오늘 같은 날엔 윤희 씨 보디가드 확실히 해 드려야죠."
그는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편의점을 향해 뛰어갔고, 그의 뒷모습이 빗속으로 사라졌어요. 100미터 남짓 떨어져 있는 거리였지만 장대같이 쏟아지는 빗줄기 속을 달린 그는 우산 하나를 사서 돌아왔을 뿐인데 옷이 거의 다 젖어 있었죠. 머리카락은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어깨와 등은 빗물에 완전히 젖어 있었죠.

"어머나, 철민 씨! 이게 뭐예요!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해요? 안 그래도 오늘 피곤했을 텐데... 서둘러 우리 집으로 가요. 가서 옷이라도 좀 말려야지. 이대로 감기 걸리면 큰일이에요."

걱정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어요. 그는 젖은 옷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새 우산을 펼쳐 나에게 씌워 주었죠. 둘이 쓰기엔 좁은 우산 아래 바싹 붙어 걸었죠. 그의 젖은 어깨가 내 팔에 닿을 때마다 그의 체온이 느껴졌어요. 빗소리가 주변 소음을 지워 주니 오직 우리 둘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았어요. 급히 집으로 가는 길, 하필이면 지나가던 차가 고인 물 위를 지나가면서 물웅덩이가 크게 튀었죠.

"어머나!"

하고 내가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고, 그의 탄탄한 허리가 손에 잡혔어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죠. 그의 숨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습니다.

"철민 씨, 미안해요."

"무슨 말씀을요. 괜찮습니다. 옷에 안 튀어서 다행이네요."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떨리는 것 같았어요. 나는 애써 어색함을 풀려고 농담을 던졌죠.

"철민 씨, 오늘따라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운 거 알아요? 꼭 백마 탄 왕자님 같아요. 호호."

"그런가요? 하하. 그럼 윤희 씨는 오늘 신데렐라네요."

그도 따라 웃었지만 웃음소리 뒤에 왠지 모를 긴장감이 서려 있는 것 같았어요. 그의 심장 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듯했죠.

그리하여 그 남자는 내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죠. 젖은 옷을 갈아입으라며 내가 입는 편안한 잠옷과 수건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잠시 망설리다가 화장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어요. 내 잠옷은 그에게 좀 작아 보였지만, 그래도 젖은 옷보다는 훨씬 나을 터였죠. 따뜻한 차라도 한잔 타 줄까 하고 부엌으로 가는데, 그가 뒤에서 나를 불렀죠.

"윤희 씨."

돌아보니 그가 현관문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옷은 갈아입었지만 머리카락은 아직 촉촉했고, 그의 눈빛이 흔들렸죠. 그의 눈 안에 담긴 마음이 읽히는 듯했어요. 그의 눈동자는 깊고 진했어요.

"실은... 처음 가게 오셨을 때부터 윤희 씨한테 자꾸 눈이 갔어요. 매일 혼자 오셔서도 밝게 웃으면서 맛있게 드시는 모습이 좋아 보였고, 뭔가 모르게 자꾸 신경이 쓰였어요. 그러다 연락처도 알게 되고, 이렇게 얘기도 나누면서, 특히 윤희 씨가 저랑 비슷한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걸 알게 되고 나니까 자꾸 마음이 가요.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의 솔직한 고백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어요. 쿵쾅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정도였거든요. ‘외로운 처지에 서로에게 끌리는 마음, 어쩌면 이건 일시적인 감정일지도 몰라. 상처 입은 영혼들이 서로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마음일지도 몰라.’ 뻔하디 뻔한 작업성 멘트라고 생각하면서도 쉰살이 넘어 이런 감정을 느껴본 게 얼마만인가 싶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죠. 나 역시 그에게 끌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의 따뜻함과 순수함에 이미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어요. 이대로 이 밤을 보내고 싶지 않았죠. 더 이상 외롭고 싶지 않았어요.

그의 손이 내 어깨에 닿았고, 그대로 그는 나에게 다가와 입을 맞추었죠. 그리고는 평소 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며, 서로 외로운 처지에 잘 한번 해보자는 뻔하디 뻔한 작업성 멘트에 넘어가서 결국엔 하룻밤을 보내고 말았죠. 어쩌면 넘어갔다기보다 나 스스로 그에게로 달려들어 버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어요. 그 순간, 나는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죠. 그저 그의 따뜻함에, 그의 진심에, 그리고 그의 젊음에 나 자신을 맡기고 싶었죠.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되었습니다. 15살 차이가 나는 연하남이었어요. 교제를 시작하면서부터 걱정이 많았어요. 내 나이에 대한 부담감, 그리고 그 친구에 대한 불안감. 35살,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그가 쉰살인 나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할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죠. 과거의 환승 이별 트라우마 때문인지, 아니면 현실적인 나이 차이와 사회적인 시선 때문인지 늘 불안의 그림자가 따라다녔어요. 그의 젊음 앞에서 나는 자꾸만 위축되었고요. 그래도 약간의 우여곡절 끝에 나는 그를 받아들였죠. 그의 순수한 마음, 성실함, 그리고 나를 아껴 주는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었죠. 그 역시 나에게 진심인 것 같았고, 그의 따뜻함과 성실함에 마음이 움직였어요.

그렇게 5개월째, 우리는 이쁘게 만나오고 있었죠.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만났고, 소소한 데이트를 즐겼어요. 그의 가게에 가서 짬뽕을 먹으며 그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고, 퇴근 후 만나 맛있는 저녁을 함께 먹거나 내 집에서 편안하게 영화를 보기도 했죠. 때로는 주말에 근교로 드라이브를 가거나 둘만 아는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어요. 평범하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들이었어요.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과 안정감이었죠. 그의 품에 안겨 있으면 세상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것 같았어요. 나이와 현실을 잊고 그저 사랑하는 연인들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죠.

하지만 연애가 깊어질수록 그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망설임 같은 것이 느껴지더라고요. 미래에 대한 이야기,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는 말을 돌리거나 얼버무렸죠. 그의 눈빛 속에 담긴 깊은 사랑을 믿고 싶으면서도 현실이라는 차가운 벽 앞에서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어요. 그리고 결국 그날,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죠. 함께 저녁을 먹고 단골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어요. 분위기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그의 표정에는 긴장감이 역력했죠.

"윤희 씨, 할 말이 있는데..."

그의 진지한 목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죠. ‘올 것이 왔구나’ 싶었죠. 왠지 모르게 불안했죠.

"응, 철민 씨. 말해 봐."

나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죠.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깊은 숨을 내쉬고는 어렵게 입을 열었죠.

"윤희 씨를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하지만’이라는 말에 숨을 멈췄죠. 그 뒤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어요. 머릿속이 하얘졌어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그리고... 서로 부담 없이 만났으면 좋겠어요."

그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박혔죠. ‘부담 없이 만났으면 좋겠다.’ 그 말은 마치 차가운 얼음 조각처럼 내 가슴에 떨어져 깨지는 듯했죠.

‘부담 없이? 부담 없이 만나자고? 그건 나랑 연애는 해도, 즐겁게 만나기는 해도 결혼이나 진지한 미래는 생각 없다는 말이잖아요. 돌려 말했지만 의미는 너무나 명확했죠. 젊은 너에게 쉰살의 나는 미래를 함께 그릴 상대가 아니라는 말이잖아요.’

나는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죠. 가슴 속에서는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었어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천장을 올려다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죠.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말이기도 했어요. 15살 연하남과의 연애에서 결혼을 기대하는 게 욕심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수없이 다독여왔죠. 그의 사업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려 줘야 한다는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막상 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팠죠.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어요.

‘내가 이렇게밖에 안 되나? 나는 사랑받고 안정적인 관계를 가질 자격이 없는 건가? 또다시 버림받는 건가? 환승 이별 이후 그렇게 발버둥 쳤는데, 겨우 잡은 인연이 또 이렇게 나에게 상처를 주는 건가?’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었죠. 갑자기 스스로가 한심하고, 초라하고, 비참해졌어요. 그의 눈을 더 이상 마주 볼 수가 없었죠. 온몸에 기운이 빠져나갔죠.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숨 쉬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질식할 것 같았거든요.

"먼저 갈게."

나는 벌떡 일어나 가방을 들고 카페 밖으로 뛰쳐나왔죠. 뒤에서 그가 다급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죠.

"윤희 씨! 잠깐만요!"

그가 문을 박차고 나와 내 팔을 잡았죠.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어요. 그의 얼굴은 당황함과 미안함으로 일그러져 있었죠.

"왜 그래, 갑자기? 오해하지 마."

나는 돌아보지 않고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어요.

"오해 아니잖아! 내 말이 맞겠지!"

"내가 너무 성급했나 봐. 아니야, 윤희 씨.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나이 차이가 좀 나니까 혹시 윤희 씨가 나 때문에 미래에 대해 너무 깊게 생각해서 부담 가질까 봐, 너무 서둘러 결혼을 생각하거나 압박감을 느낄까 봐 그런 뜻이었어. 내가 아직 사업도 안정되지 않았고... 그래서 윤희 씨를 좋아하고 만나는 건 정말 진심이야. 변함없어. 그저 좀 더 편하게,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면서 그렇게 만나고 싶다는 얘기였어."

그는 말주변이 상당히 없었어요. 급하게 뱉어내는 그의 말들이 앞뒤가 맞지 않고 주어와 서술어가 뒤엉켰죠. 그의 진심을 애써 포장하려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고, 변명처럼 들리기도 했죠. 내용은 이상했지만 그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나에게 나쁜 뜻이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었죠. 그는 정말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단지 지금 당장은 결혼이나 미래를 약속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나이 차이로 인해 자신이 짊어져야 할 부담감 때문에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서툰 말로 표현했을 뿐이라는 것을요.

나는 길가에 멈춰서 그의 얼굴을 보았죠. 불안정해 보이는 그의 눈빛, 나를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간절함. 그의 진심은 느껴졌지만 ‘결혼 생각 없다’는 말이 그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어요. 그 남자도 딴 뜻이 없다는 걸 알기에 더 이상 여기서 싸우거나 추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아프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했어요.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이며 말했죠.

"알겠어. 오해 안 할게."

그렇게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그냥 넘어갔죠. 그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그리고 그 후 며칠 동안 가슴이 먹먹했죠. 그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죠. ‘부담 없이 만나자.’ ‘결혼에 대해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아플 수도 있고, 이전의 상처가 너무 커서 걱정과 이별의 준비를 가지고 시작한 연애인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팠죠. 그의 진심이 느껴져서 더 아팠는지도 몰랐네요. 그는 나를 아끼지만, 그 아낌이 결혼까지 이어질 만큼 깊은지는 알 수 없었어요.

포기해야 하는 부분은 포기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었죠. 15살 연하남과의 연애, 처음부터 결혼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죠. 하지만 좋아하는 감정이 자꾸만 커져 가서 감정 컨트롤이 잘 안 되었죠. 그의 따뜻한 눈빛, 다정한 목소리, 나를 향한 그의 마음, 이 모든 것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의 ‘부담 없이 만나자’는 말 이후, 나는 자꾸만 그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했죠. 혹시나 그의 마음이 변할까 노심초사했어요. 그의 말 한마디에, 표정 변화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했죠. 이런 내 자신이 너무나 싫었죠. 하지만 그는 변함없이 나에게 잘해주었습니다. 여전히 가게에 가면 반갑게 맞아 주었고, 연락도 자주 했으며, 데이트할 때도 나를 최우선으로 배려해 주었죠. 그의 진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어요. 우리는 다시 평소처럼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죠. 비교적 순조롭게 잘 만나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의 ‘부담 없이 만나자’는 말은 잊히지 않았죠. 마치 우리의 관계 위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놓여 있는 것 같아요. 연애하면서 ‘나랑은 결혼 생각이 없다니.’ 그 사실이 자꾸만 가슴 속에서 맴돌며 나를 속상하게 만들었네요. 그의 진심을 믿고 싶으면서도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결혼’이라는 단어 앞에서 작아지고 초조해지는 내 모습 때문에 하루하루가 복잡했어요. 이 연애의 끝은 어디일까? 또다시 아픈 이별을 맞이하게 될까? 아니면 그의 마음이 변해 기적처럼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게 될까? 알 수 없죠. 그저 오늘 하루, 그의 따뜻한 눈빛과 웃음, 그리고 나를 향한 변함없는 마음에 기대어 버텨낼 뿐이죠. 속상하지만 어쩌겠어요. 지금 이 순간 나는 그를 좋아하고, 그 역시 나를 좋아하고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이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죠. 이 관계의 불확실성 속에서 나는 또다시 나만의 연애의 기술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상처받지 않고 사랑하는 법을, 혹은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법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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